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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사커’로 불러도 발끈하지 말자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2022 카타르 월드컵 B조에서 만난 잉글랜드와 미국은 경기를 하기 전부터 으르렁거렸다. 축구의 명칭을 두고 ‘풋볼(football)’과 ‘사커(soccer)’로 대립한 것이다. 이 경기를 전후해 소셜미디어(SNS)에서 풋볼이란 명칭을 지지하는 팬들은 “이 경기는 사커가 아니다”는 주장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반면 미국 팬들은 “이것은 사커”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 미국의 다음 상대는 네덜란드였다. 경기에 앞서 트위터 영상에 등장한 조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대표팀을 응원하며 ‘풋볼’과 ‘사커’라는 호칭에 관한 해묵은 논란을 재개했다. 영상 속의 대표팀 주장 타일러 아담스는 카타르 축구장에서 7000마일 떨어진 백악관으로 공을 찼다. 백악관에서 축구공을 집어 든 바이든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It’s called soccer, GO USA(이것은 사커라고 불린다. 미국 파이팅)”이라고 말한 것이다.16강전 승자는 미국을 3-1로 이긴 네덜란드였다. 이에 네덜란드 총리 마르크 뤼터는 트위터에 “Sorry Joe, football won(조, 미안하지만 풋볼이 이겼다)”고 적고 윙크 이모티콘을 덧붙였다. 그러자 바이든은 축하를 보내면서 “Strictly speaking, shouldn't it be 'voetbal’(엄밀히 말하면 voetbal 아닌가요?)”라는 농담을 건넸다. Voetbal은 축구를 뜻하는 네덜란드어로 발음은 풋볼과 비슷하다.미국인들은 자국에서 풋볼로 불리는 미식축구와 구분하기 위해 축구를 사커라고 부른다. 이에 사커는 ‘더러운 미국주의(filthy Americanism)’의 산물이라고 말하는 축구팬들이 많다. 또한 사커를 미국의 스포츠 문화를 대표하는 ‘치어리딩(Cheerleading)’, ‘동물의 이름을 딴 팀 이름’과 동일시하는 경향도 있다. 실제로 잉글랜드 축구팬을 짜증 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은 풋볼을 사커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풋볼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런 인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공을 차고 손으로 잡는 형태의 운동은 고대 그리스, 중국의 송나라, 중앙아시아,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 대륙의 원주민이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FIFA(국제축구연맹)는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 고대에 행해진 어떠한 유사한 경기도 축구와 역사적인 연관성이 없다고 선을 긋고 있다.중세 시대 유럽의 여러 국가와 특히 잉글랜드에서 인기를 얻은 공놀이가 있었다. ‘몹(mob, 군중)’ 풋볼이라고 불렸던 중세 경기는 선수 숫자 제한이 없어 많은 사람들의 참여가 가능했고, 규칙도 거의 없었다. 당시 풋볼은 공을 이동시키기 위해서 과실치사나 살인으로 이어지지만 않으면, 모든 수단이 용납됐다고 한다. 그러나 몹 풋볼로 인해 인명,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사례가 지속되자 이를 금지하는 법이 잉글랜드에서 여러 번 만들어졌다.19세기 영국의 ‘퍼블릭 스쿨(public school, 사립학교를 의미)’은 현대 풋볼의 탄생에 중요한 토대를 쌓았다. 퍼블릭 스쿨은 풋볼을 ‘키킹(kicking, 발차기)’과 ‘캐링(carrying, 손으로 나르기)’이라는 2개의 코드로 명확하게 구분했다.럭비 풋볼은 캐링 코드를 대표한다. 1845년 럭비 풋볼의 규칙이 처음으로 성문화된 곳이 잉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퍼블릭 스쿨인 럭비 스쿨이다. 키킹 코드에 속하는 풋볼은 1863년 ‘Laws of the Game’으로 불리는 규칙을 만들었고, 세계 최초의 축구협회인 ‘The FA(The Football Association)’를 창설했다. 협회의 규칙에 따라 진행된 풋볼에는 ‘어소시에이션 풋볼(Association Football)’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축구다. 사커란 명칭은 어소시에이션 풋볼에서 유래했다. 1870년대 옥스포드 대학교 학생들은 “association”을 줄이고 “-er”을 합쳐 “어사커(assoccer, 영국식 발음은 어소커)”를 만들었고, 같은 방식으로 럭비 풋볼은 “러거(rugger)”로 칭했다. 2차 세계대전 무렵 어사커는 더 축약되어 현재의 사커가 됐다.그저 그런 팀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명문 클럽으로 만든 버스비의 자서전 제목에 사커와 풋볼이 동시에 쓰였다. 월드 사커는 1960년에 개간해 현재까지 발행되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잡지인데, 잡지명이 풋볼이 아닌 사커다. 이외에도 1959년 데일리 미러 신문사가 발행한 기사에도 축구를 사커로 표시했다. 1964년에 첫 방송을 한 BBC의 유명 축구프로그램인 ‘매치 오브 더 데이(Match of the Day)’도 1970년대 후반까지는 사커를 즐겨 썼다. 이렇게 오랫동안 널리 쓰였던 사커라는 단어가 1980년대 이후 영국에서 점차 모습을 감춘다. 미국의 프로축구리그인 ‘NASL(North American Soccer League)’이 70년대 후반부터 축구 스타 펠레, 베켄바워, 크루이프, 유세비오, 조지 베스트 등을 영입하며 큰 인기를 끌자, 미국인들이 사커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썼기 때문이다. 즉 미국에서 일시적으로 사커가 인기를 얻게 되자, 이 단어는 영국에서 불결한 것이 됐다. 아일랜드의 한 신문사는 이를 가리켜 영국인의 ‘집단적 언어 기억상실증(collective linguistic amnesia)’이라고 비꼰 적도 있다. 따라서 사커라는 호칭은 축구에 대한 배신이 절대 아니다. 잉글랜드의 축구팬들이 사커라는 단어에 보이는 ‘짜증’도 무지의 산물이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4.03.15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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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영국 축구장에서 새우 샌드위치를 먹으면 안되는 이유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듯이 ‘플라스틱 팬(Plastic Fan)’은 잉글랜드에서 가짜 축구 팬을 의미한다. 1960년대 좋은 성적을 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를 쫓아 축구 역사상 처음으로 플라스틱 팬이 등장했다. 맨유에 이어 리버풀FC가 1970~80년대 자국리그와 유럽대항전에서 황금기를 보내자, 가짜 팬은 더 늘어났다. 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플라스틱 팬의 절대적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1992년 프리미어리그(EPL)가 출범했고, 몇 년 후 플라스틱 팬은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다시 한번 이러한 흐름을 주도한 클럽은 맨유였다. 맨유는 90년대 EPL의 절대 강자였다. 아울러 에릭 칸토나, 라이언 긱스, 데이비드 베컴 등이 가진 카리스마, 압도적인 실력과 멋진 외모로 인해 영국 전역에서 맨유를 응원하는 사람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렇게 맨유가 전국구 팀이 되면서 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게 되자, 이에 따른 부작용도 등장했다. 새로 유입된 팬 중에 상당수가 플라스틱이었던 것이다. 1999년 퍼거슨 감독은 홈구장인 올드 트래포드의 분위기에 실망했다고 밝히며, 홈 관중들이 더 큰 소리로 열성적인 응원을 보내줄 것을 공개적으로 요청했다.2000년 11월 맨유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우크라이나의 명문 클럽 디나모 키이우와 만났다. 맨유가 챔피언스리그 다음 라운드 진출을 위해서는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였다(a must-win game).” 경기는 팽팽히 진행된 끝에 셰링엄의 골로 맨유가 1-0으로 이겼다.하지만 경기 후 주장 로이 킨은 화가 단단히 났다. 그는 BBC 라디오와의 인터뷰에서 홈구장의 일부 팬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킨은 “맨유가 어웨이 경기를 가질 때, 원정 응원 온 팬들은 환상적이다. 하지만 홈에서 경기를 할 때 일부 관중은 경기에 관심도 없고, 응원도 안 한다. 단지 그들은 새우 샌드위치를 먹느라 바쁠 뿐이다”라고 밝혔다. 킨의 유명한 ‘새우 샌드위치’ 발언은 이렇게 탄생했다. 킨은 이렇게 새우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들(eaters)’과의 전쟁을 선언했고, 잉글랜드 언론은 이들을 ‘새우 샌드위치 여단(prawn sandwich brigade)’이라 칭했다. 다시 말해 새우 샌드위치 여단이란 축구에는 별 관심이 없으나, 경기장의 스카이 박스(sky box)에 앉아 접대를 즐기기 위해 경기장을 방문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다. 따라서 이들은 플라스틱 팬이다. 스카이 박스를 이용하려면 ‘호스피탈리티(hospitality, 환대)’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일반 입장권보다 훨씬 비싼 이 티켓을 가진 관중은 여러 특혜를 누릴 수 있다. 축구를 보기에 최고의 좌석이 제공되는 것은 물론이고, 경기 중 다양한 음료와 고급 음식도 맛볼 수 있다. 기념품 판매대와 라운지 등을 독점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이들은 일반 티켓을 가진 팬보다 구장에 훨씬 오래 머물 수 있는 권리도 갖는다. 구단 입장에서는 새우 샌드위치 여단이 축구에 특별한 관심을 안 보여도, 일반 티켓 소지자들보다 훨씬 많은 수입을 안겨주기에 이들을 환영한다.로이 킨의 새우 샌드위치 발언이 나온 지 23년이 지났다. 그 사이 EPL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축구리그가 되었고, 맨유, 리버풀 같은 빅 클럽들은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EPL 경기장은 더욱더 커지고, 현대화됐으며 입장료는 더 이상 잉글랜드의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축구장의 원래 주인이었던 노동자들이 쫓겨난 자리는 중산층과 호스피탈리티 패키지를 구입한 이들로 대체됐다. 해외에서 건너온 부자 관광객들도 이에 가세했다.EPL에는 더 이상 로이 킨 같이 진정한 축구 선수나 팬이 지켜야 할 덕목을 저버렸을 때 직설적으로 이를 비판하는 선수가 없다. 킨의 다혈질 적인 성격은 때때로 그를 곤경에 빠트렸지만, 그는 주장으로서 모든 책임을 다 짊어지는 진정한 리더였다. 더 이상 현대 축구에 킨 같은 선수가 나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올드 팬들은 예전의 순수했던 축구를 더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2023.10.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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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맨유-리버풀 130년 라이벌의 시작은 축구가 아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와 리버풀 FC간의 치열한 라이벌 전은 국내 팬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맨유와 리버풀은 1992년 출범한 프리미어리그(EPL)를 포함해 잉글랜드 프로축구 1부리그에서 각각 20번, 19번 우승했다. 맨유와 리버풀이 리그 2위를 차지한 적은 각각 17번, 15번이다. 맨유가 국내 성적에서 리버풀을 근소하게 앞서지만, 유럽대항전에서의 성적은 리버풀이 더 좋다. 리버풀은 유러피언컵과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6번 우승한 데 반해, 맨유는 유럽 정상에 3번 올랐다. 맨유와 리버풀은 잉글랜드에서 가장 성공한 클럽이다. 3번째로 성적이 좋은 팀은 아스날(우승 13번, 2위 10번)이다. 하지만 아스날은 기록에서 두 팀과 차이가 있고, 유럽챔피언에 오른 적도 없다. 게다가 아스날의 연고지는 지리적으로 꽤 먼 런던이다. 그에 반해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불과 35마일(약 56㎞) 떨어져 있다. 맨유와 리버풀이 라이벌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맨체스터 시티와 리버풀, 혹은 리버풀 시의 서북부에 위치한 에버튼과 맨유의 관계는 어떨까? 그들도 서로를 미워할까? 라이벌 관계는 맨유와 리버풀에만 해당하는지 의문을 가진 독자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필자와 함께 2회에 걸쳐 잉글랜드 축구를 대표하는 도시인 맨체스터와 리버풀에 관해 알아보자.영국 북서부에 위치한 맨체스터와 리버풀은 18세기의 산업혁명 이후 경제와 산업분야에서 오랫동안 경쟁했던 라이벌 도시다. 대영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 기간을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라고 칭하는데, 두 도시는 이 시기에 급격한 산업화를 겪었다. 1830년 세계 최초의 도시 간 철도가 완공돼 두 도시를 연결했다. 이 철도는 맨체스터 지역의 공장에서 생산한 완제품과 원자재를 리버풀 항구로 신속하게 운송할 목적으로 건설됐다. 경제적으로도 흑자였던 이 노선으로 인해 영국의 철도 개발은 탄력을 받게 된다.18세기까지 맨체스터는 영국 북부를 대표하는 도시였다. 18세기 후반 리버풀은 북부 면직물 공장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항구 도시로 우뚝 선다. 리버풀은 19세기에 성장을 거듭해 맨체스터를 앞질렀고,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에는 대영제국 제2의 도시로 성장한다.한편 19세기 후반 오랜 불황을 겪던 맨체스터 상인들은 상품을 수출입할 때, 리버풀 항구가 부과하는 높은 관세와 두 도시를 잇는 철도 요금에 불만이 많았다. 이에 내륙도시 맨체스터가 물자를 직접 조달할 수 있게 운하를 건설하자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리버풀은 '멘붕'에 빠졌다. 리버풀의 정치인들은 운하 건설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공사는 이어졌다. 두 도시의 관계도 급격히 나빠졌다. 결국 6년의 공사 끝에 1894년 58㎞ 길이의 ‘맨체스터 선박 운하(Manchester Ship Canal)’가 완공된다.맨체스터가 내륙 항구 역할까지 하게 되자, 통관료 등의 수입이 사라진 리버풀 경제는 불황에 휩싸인다. 항만에서 일했던 부두 노동자들의 일자리도 없어졌다. 이에 리버풀의 부두 노동자들과 맨체스터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맨유의 전신은 1878년 창단한 뉴턴 히스(Newton Heath) LYR FC다. LYR은 ‘랭카셔 & 요크셔 철도회사(Lancashire and Yorkshire Railway)’의 약자다. 뉴턴 히스는 풋볼 얼라이언스를 거친 후 1892~93시즌부터 풋볼 리그의 1부리그에 합류했다. 이때 철도회사로부터 독립하면서 클럽 이름에서 LYR이 삭제됐고, 1902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클럽 명이 바뀐다.에버튼은 1888년 설립한 세계 최초의 프로축구리그인 풋볼 리그의 창단 멤버다. 에버튼을 공동으로 창단한 존 하울딩은 안필드 구장의 소유자였고, 당시 안필드는 에버튼의 홈구장이었다. 하지만 구장의 높은 임대료에 불만을 품은 에버튼이 구디슨 파크로 보금자리를 옮기자, 하울딩은 비어있는 안필드를 위해 1892년 축구팀을 창단한다. 이 클럽이 바로 리버풀이다. 공교롭게도 뉴턴 히스와 리버풀의 첫 만남은 맨체스터 선박 운하가 완공된 지 3개월 만에 성사된다. 당시 뉴턴 히스는 1부리그 꼴찌인 16등을 기록했고, 리버풀은 2부리그에서 1위를 한 상태였다. 당시에는 자동 승격이나 강등이 없었기에, 두 팀은 단판 승부인 ‘테스트 매치(test match)’를 해야 했다. 운하 건설로 가뜩이나 사이가 나빠진 두 도시의 뉴턴 히스와 리버풀이 승격과 강등을 놓고 운명의 한판 대결을 벌인 것이다. 결과는 리버풀의 2-0 승. 이로써 리버풀은 1부리그로 승격했고, 뉴턴 히스는 2부리그로 강등당한다. 맨유와 리버풀에 입단하는 선수들은 두 도시의 경쟁 관계와 운하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고 한다. 맨유의 센터백이었던 네마냐 비디치는 2019년 인디펜던트 신문사와의 인터뷰 때 선수들에게 때로는 그런 설명이 필요 없다고 밝혔다. 그는 “두 클럽이 맞붙는 경기의 관중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만으로도, 그들에게 이 경기가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현재까지 두 클럽은 211번 만났다. 맨유와 리버풀이 각각 82승, 71승을 거뒀고, 무승부는 58번 있었다. 최다 출전 선수는 맨유의 라이언 긱스(48번)이고, 최다 득점자는 리버풀의 모하메드 살라(12골)다. 필자는 맨체스터와 리버풀을 여러 번 방문했으나, 끝내 두 클럽의 경기를 직관하지 못했다. 표를 구하기 굉장히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잉글랜드 축구의 최대 라이벌 전을 직관할 수 있는 행운이 독자 여러분에게 있길 바란다.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8.12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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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유벤투스와 5부리그 노츠 카운티의 120년 우정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북서쪽으로 180㎞ 떨어진 곳에는 전설적인 의적 로빈 후드의 도시 노팅엄이 있다. 노팅엄의 인구는 32만 명에 불과하나, 이 도시에는 유서 깊은 프로축구팀이 2개나 있다. 노츠 카운티(Notts County)와 노팅엄 포레스트가 바로 그들이다. 노츠 카운티의 홈구장인 메도우 레인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시티 그라운드는 트렌트 강을 사이에 두고 겨우 270m 떨어져 있다. 잉글랜드에서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두 클럽의 경기를 '노팅엄 더비'라고 부른다. 하지만 두 클럽이 같은 리그에서 더비 경기를 가진 것은 1994년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노팅엄은 노츠보다 최소한 한 단계 높은 리그에 속했기 때문이다. 노팅엄은 리버풀과 함께 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을 2연패한 잉글랜드 클럽이다. 그에 반해 노츠 카운티는 1부리그에서 1992년 강등당한 이후 계속 추락해 현재는 5부리그에 속해 있다. 눈에 띄지 않는 성적으로 인해 노츠 카운티는 국내 축구팬들에게 생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클럽은 세계축구사에 2개의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노츠 카운티 로고: 클럽의 상징과도 같은 검은색과 흰색 줄무늬 셔츠로 인해, 노츠 카운티는 ‘The Magpies(까치들)’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필자가 많이 받는 질문이 하나 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은 어느 팀인가?”이다. 많은 팬들이 궁금해하는 이 질문의 정확한 답을 알아보자. 사우스요크셔 주에 위치한 셰필드는 잉글랜드의 ‘스포츠 수도’라고 불릴 정도로 스포츠와 연관이 많은 도시다. 이곳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 셰필드 FC가 1857년 창단됐다. 잉글랜드축구협회(FA)는 1885년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을 축구에 도입 하나, 셰필드 FC는 그들의 아마추어 원칙과 뿌리를 고수하며 프로 전환을 강하게 거부했다. 따라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클럽인 셰필드 FC는 아마추어 팀이고 현재 8부리그에 속해 있다. 그렇다면 세계 최초의 프로축구팀은 누구일까? 1862년 창단된 노츠 카운티다. FA보다도 1년 먼저 설립된 노츠 카운티는 세계 최초의 프로축구리그인 ‘풋볼 리그’가 1888년 출범할 때, 이에 참여한 12개 팀 중 하나였다. 노츠 카운티가 남긴 또 하나의 위대한 유산은 그들의 셔츠와 관계 있다. 이들은 1890년 검은색과 흰색 줄무늬 셔츠를 도입한 이후, 구단 역사의 대부분을 이 색상과 함께했다. 검은색과 흰색 줄무늬 셔츠를 입은 클럽은 여럿 있으나, 이 중 대표주자는 이탈리아의 최고 명문 클럽 유벤투스이다. 하지만 이들이 처음부터 흑백 줄무늬 셔츠를 입은 것은 아니었다. 1897년 토리노에서 창단한 유벤투스는 원래 핑크색 셔츠를 입었다. 그러나 계속된 세탁으로 인해 셔츠의 색이 퇴색되자, 1903년 클럽은 새로운 색상의 셔츠를 도입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유벤투스 선수단에는 잉글랜드 출신의 존 새비지가 있었다. 클럽은 새비지에게 세탁을 해도 색이 변형되지 않는 셔츠를 잉글랜드에서 구입하는 것이 가능한지 물어본다. 이에 새비지는 자신의 고향 팀 노츠 카운티에 도움을 청했고, 이를 흔쾌히 허락한 클럽은 자신들의 셔츠를 토리노에 보냈다. 유벤투스는 흑백 줄무늬의 뚜렷한 대조와 강력한 느낌의 디자인을 가진 노츠의 셔츠에 한 눈에 반했다고 한다. 유벤투스의 상징이 된 ‘비안코네리(Bianconeri, 흰색과 검은색을 의미)’는 이렇게 탄생했다. 같은 색상과 디자인의 셔츠를 입었지만 두 클럽의 성적은 극명하게 갈린다. 유벤투스는 흑백 줄무늬 셔츠를 입은 지 2년만인 1905년 이탈리아 챔피언에 처음으로 등극한다. 또한 유벤투스는 미셸 플라티니, 지네딘 지단, 잔루이지 부폰 등과 같은 전설적인 선수들을 이끌고 세리에A의 최다 우승팀(36회)이 된다. 그에 반해 잉글랜드의 작은 클럽 노츠 카운티는 160년의 역사 동안 1부리그에서 보낸 시즌은 30번에 불과하다. 최고 성적도 FA컵 우승(1894년) 한번이 전부다. 2011년 9월 안토니오 콘테 감독이 이끄는 유벤투스가 4만 1000석 규모의 최신식 구장을 오픈할 때, 이들의 개장식 경기 상대는 빅 클럽이 아니었다. 초청 상대는 당시 3부리그에 속해 있던 노츠 카운티였다. 유벤투스는 유럽 축구의 거인으로 성장했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인 비안코네리를 전해준 노츠 카운티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2019년 5부리그로 강등된 노츠 카운티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에 유벤투스는 116년 전의 빛을 갚기 위해 노츠에 셔츠를 보내주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유벤투스의 셔츠 제조사가 아디다스인 관계로, 이미 퓨마와 계약이 되어있던 노츠는 이 제안을 정중히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돈이 축구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는 시대에 빅 클럽인 유벤투스가 작은 클럽인 노츠 카운티를 상대로 보여준 끈끈한 우정은 동화 같은 스토리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3.03.22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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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축구 에이전트, 올 여름 이적시장서 6855억원 벌어”

스포츠 에이전트는 미래 유망직업 중 하나다. 스포츠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됨에 따라 스포츠 시장이 커지면서 선수의 이적을 둘러싸고 각 구단이 치열한 영입전을 펼치는 과정에서 스포츠 에이전트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에이전트는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에서 활동하며 ‘악마’로 불린 스캇 보라스다. 그는 박찬호와 추신수, 류현진 등의 에이전트로도 유명했다. 축구에서는 미노라이올라가 굵직한 계약을 여러 차례 성공하며 명성을 얻었다. 시즌이 끝난 후 FA(자유계약선수)를 통해 대형 계약이 이뤄지는 야구와 달리 축구는 한 해에 두 번(겨울, 여름) 천문학적인 금액이 오가는 계약이 성사된다. 얼마가 오갈까. 국제축구연맹(FIFA)는 9일(한국시간) 올여름이적 시장(6월 1일~9월 1일) 동안 발생한 이적료를 발표했다. FIFA에 따르면 올여름이적 시장에서 남자 축구선수의 이적료는 50억 달러(6조 9325억원)가 발생했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서 발생한 이적료(38억 5000만 달러) 대비 29.7% 증가했다. 코로나19 이전인 2018년(52억 6000만 달러) 2019년(58억 달러) 수준으로 올라왔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여름 이적 사업의 대부분은 잉글랜드 축구에서 이뤄졌다”고 전했다. 매체에 따르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서만 약 19억 파운드(3조 205억원)의 이적료가 발생했으며, 2017~18시즌에 기록한 18억 6000만 파운드(2조 9569억원)를 넘은 신기록이다. FIFA의 보고서를 살펴봐도 유럽축구연맹(UEFA) 소속 프로축구리그에서 가장 많은 이적료가 발생했다. 잉글랜드 리그가 18억 950만 달러(2조 5088억원)를 기록했다. 이탈리아(5억 498만 달러) 스페인(4억 499만 달러) 프랑스(4억 700만 달러) 독일(4억 600만 달러)이 뒤를 이었다. 선수 이적 수는 남녀 모두 올여름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남자 선수는 총 9717건의 이적이 발생해 작년(8346명) 대비 16.2% 증가했다. 여자 선수 이적 역시 올해 684명 발생해 지난해 598명보다 14.4% 올랐다. 이적 시장이 활발해진 덕분에 선수 에이전트들은 4억 9440만 달러(6855억원)의 수수료를 챙긴 것으로 조사됐다. FIFA는 이러한 조사 결과에 대해 2012년 6.1%였던 에이전트 수수료 비율이 10년이 지난 후 2022년에는 9.9%로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김영서 기자 zerostop@edaily.co.kr 2022.09.0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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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이탈리아 축구가 둘째라면 서러워할 것, 인종차별①

2002 한일월드컵 16강전에서 대한민국은 연장 후반에 터진 안정환의 골든골로 이탈리아에 2-1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탈리아의 찌질한 복수는 바로 시작됐다. 다음날 당시 안정환의 소속팀이었던 이탈리아의 페루자 구단주는 그와의 계약 해지를 언급하며 “I have no intention of paying a salary to someone who has ruined Italian football(이탈리아 축구를 망친 안정환에게 월급을 줄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밝힌 구단주는 “안정환은 다시는 페루자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안정환이 유럽인이었어도 저런 발언이 나왔을까? 일개 팬이 홧김에 보인 반응이 아니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세계 최고 프로축구리그 중의 하나로 평가받는 세리에A 구단주의 발언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이고 경솔했다. 그의 발언을 통해 이탈리아 축구에 뿌리 깊게 박힌 인종차별이 다시 한번 확인된 것이다. 당시 이탈리아 집에 있던 안정환의 승용차는 박살이 났다고 한다. 심지어 마피아는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불똥은 아시아인 전체로 퍼졌다. 이탈리아에 있던 동북아시아 사람들은 모두 ‘한국인’ 취급당하며 모욕과 욕설에 시달려야 했다. 물론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인종차별이 없는 사회는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는 다른 서유럽국가에 비해 인종차별이 유독 심하다. 2017년 미국의 싱크탱크인 퓨리서치센터는 서유럽 15개국 국민의 민족주의와 이민자에 대한 태도를 조사했다. 22개 질문의 대답을 바탕으로 퓨리서치센터는 0에서 10까지의 범위를 갖는 님(NIM: Nationalist, anti Immigrant & Minority) 척도를 만들었다. 님 척도의 숫자가 높을수록 타민족에 대한 거부감이 높음을 보여준다. 조사된 대부분의 나라에서 5.01 이상의 점수를 받은 국민의 점유율은 15%~25% 사이였다. 스웨덴은 단지 8%의 국민만이 5점 이상을 기록했고, 유럽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로 알려진 네덜란드는 16%를 보여줬다. 그에 반해 이탈리아는 5점 이상을 기록한 국민이 무려 38%로 나타났다. 서유럽에서 가장 인종차별적인 국가는 이탈리아였던 것이다. 이와 비슷한 결과는 다른 조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2011년 국제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이탈리아 사회에서 외국인 혐오증이 증가하고 있다고 밝혔다. 2019년 이탈리아의 한 연구에 의하면 인터뷰 대상자의 55%가 인종차별적 행위를 정당화했다고 한다. 또한 로마에 위치한 정치사회연구소(Eurispes)가 2020년 펴낸 보고서에 의하면, 이탈리아인의 15.6%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대학살 ‘홀로코스트’가 일어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사회 지도층의 인종차별 발언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2008년 흑인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한테 “선탠까지 했다”는 상식 밖의 농담으로 구설에 올랐다. 우파정당인 북부연맹의 수장이자 상원 부의장인 로베르토 칼데롤리는 2013년 이탈리아 정부의 첫 흑인 장관이 된 세실 키엥게를 가리켜 “그녀를 보면 오랑우탄이 떠오른다”는 막말을 던지기도 했다. 논란이 일자 칼데롤리는 “농담이었다”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이 밖에도 북부연맹의 한 여성의원은 아프리카인이 2명의 여성을 성폭행 한 사건과 관련해 “성폭행 피해자들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키엥게 장관을 강간해야 한다”라는 끔찍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가 인종차별이 일상적인 나라라는 것을 감안해도, 키엥게 장관에 대한 언어 공격은 충격적이었다. 아울러 축구장에서 흑인 선수를 조롱하기 위해 바나나를 던지듯이, 키엥게 장관에게 바나나를 투척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인종차별은 남녀노소, 도시와 시골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좌우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18~19세기 유럽의 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전을 벌일 때 통일도 못 이룬 이탈리아는 이에 합류할 수 없었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 등이 식민지 국가들과 가진 문화적, 인적 교류를 이탈리아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들은 타 인종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캄파닐리즈모(campanilismo, 이탈리아어 종탑에서 파생된 단어로 지역마다 중심에 있는 성당 종탑의 종소리를 같이 듣고 사는 사람들의 강한 유대감을 의미)로 표현되는 이탈리아 특유의 지역주의와 가족주의 문화도 타 문화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데 일조했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아일랜드와 더불어 이민을 보내는 나라였지, 받아들이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러한 나라에 1980년대 후반 비 유럽 출신 노동자 유입이 본격화했다. 이탈리아는 빠르게 다인종, 다문화 사회로 변화했고, 최근에는 지중해를 통해 난민들까지 몰려들고 있다. 게다가 지금도 남아있는 파시즘의 유산과 베니토 무솔리니에 대한 향수, 그리고 이탈리아의 경제 침체에 이어 외국인 노동자가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심리도 타 인종에 대한 거부감에 힘을 실었다. 안정환이 페루자에서 고통받은 지 20년이 지났지만, 이탈리아 사회나 축구리그에서 인종차별은 개선되지 않았다. 도리어 2019년 당시 인터 밀란 감독이었던 안토니오 콘테는 이탈리아 축구의 인종차별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고 밝혀 충격을 주었다. 다음 칼럼에서 이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7.27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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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인종차별? 손흥민은 이미 편견과 싸워 이겼다

우연히 만난 흑인 시드니(웨슬리 스나입스)와 백인 빌리(우디 해럴슨)가 길거리 내기 농구를 하며 우정을 쌓는 과정을 그린 영화가 있다. 국내에는 ‘덩크 슛’으로 알려진 이 영화의 원제는 ‘White Men Can't Jump(백인은 점프를 못한다)’이다. 시드니는 빌리의 농구 실력은 인정한다. 하지만 백인은 점프를 잘할 수 없기 때문에, 시드니는 빌리가 덩크 슛을 못한다고 계속 놀린다. 스포츠 세계에는 “백인은 점프를 못한다”와 함께 “Black men can't swim(흑인은 수영을 못한다)"이라는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 고정관념·편견)이 널리 퍼져 있다. 아울러 서양인들은 아시안이 수학에 능하고 공부를 잘해서 회계사, 의사, 엔지니어 같은 직종에서 두각을 보인다고 생각한다. 반면 아시아인은 스포츠를 못한다는 편견을 갖고 있다. 영국에는 “Asians can’t play football(아시안은 축구를 못한다)”이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아시안은 남아시아(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등) 출신을 의미한다. 영국 인구의 7%인 약 350만명이 남아시안 혈통이다. 하지만 2022년 이들이 1~4부 프로축구리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45%에 불과하다. 프리미어리그(EPL) 선수로 범위를 좁히면 남아시아인은 4명뿐이다. 많은 남아시안 어린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지만, 극소수만이 프로 선수가 되는 것이다. 선입견에 사로잡힌 영국 프로축구 스카우트들은 이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고 한다. 동북아시아 출신 선수들은 남아시아와는 달리 EPL에 꾸준히 진출하고 있다. 중국의 쑨지하이는 맨체스터 시티 소속으로 2002년 EPL에서 최초로 골을 기록한 동북아시아 선수였다. 현재까지 14명을 EPL에 보낸 한국을 선두로 일본(10명)과 중국(7명)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몇몇 선수는 EPL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다. 하지만 영국축구계는 이들의 ‘축구 실력’보다 동북아 선수를 보유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수익 증대’에 더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을 이용해 클럽은 더 많은 셔츠를 판매할 수 있고, 새로운 스폰서십과 더 비싼 TV 중계권 계약 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에서 7시즌을 보낸 박지성은 맨유가 리그 정상을 4번 차지하는 데 기여했고, UEFA(유럽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우승에 이름을 올린 최초의 아시아 선수였다. 맨유 시절 박지성은 ‘Three-Lung Park(3개의 폐를 가진 박지성)’이라는 닉 네임을 얻었다. 엄청난 체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그라운드를 누볐기 때문이다. 박지성은 기술적으로도 훌륭한 선수였지만, 그조차도 미묘한 편견에 시달렸다. 잉글랜드 축구계가 가진 동북아시아 선수들을 향한 스테레오 타입 중 하나가 ‘열심히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긍정적인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이들은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에 출전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체력을 바탕으로 열심히 뛸 수밖에 없다는 뜻도 함축하고 있다. 창의력과 재능이 부족하다는 아시아 선수들은 기술로 칭찬받은 적이 없다. 돋보이지 않는 곳에서 팀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이들의 미덕으로 포장될 때도 있었다. 2021~22시즌 손흥민은 EPL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페널티킥 없이 필드골로만 23골을 기록하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공동)득점왕에 올랐고, 소속팀 토트넘을 4위로 이끌어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을 따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흥민은 잉글랜드 프로축구선수협회(PFA)가 주관하는 ‘올해의 선수(Player of the Year)’ 최종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게다가 ‘올해의 팀(Team of the Year)’에도 선정되지 않았다. 이렇게 손흥민이 외면받자 팬들의 성토와 언론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객관적인 자료를 등한시했기 때문이다. PFA 상은 동료 선수의 투표로 결정된다. 문제는 선수들이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심사숙고하여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친분이 있거나 유명 선수에게 투표한다는 것이다. 또한 낮은 투표율과 시즌이 종료되기도 한참 전에 시작하는 투표 시기도 논란의 대상이다. 이번 시즌의 손흥민과 같이 리그 종반에 특히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선수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다. 손흥민이 인종차별을 당했다는 주장도 널리 퍼져 있다. 과거 기록을 통해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이를 살펴보자. 1992~93시즌 출범한 EPL에서 득점왕이 PFA 올해의 팀에 오르지 못한 적은 11번 있었다. 이들의 국적은 잉글랜드(테디 셰링엄, 앤디 콜, 크리스 서튼, 디온 더블린, 마이클 오언), 네덜란드(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 뤼트 판 니스텔로이), 아르헨티나(세르히오 아구에로), 가봉(피에르 에메릭오바메양)과 이집트(모하메드 살라)다. 특히 하셀바잉크는 득점왕에 2번(공동, 단독 각각 1번)이나 올랐는데도 올해의 팀에 선정되지 못했다. 2010~11시즌 이후로 EPL 득점왕이 PFA 올해의 선수상 후보에 못 올라간 적도 5번 있었다. 이들의 국적은 불가리아(디미타르 베르바토프), 아르헨티나(아구에로), 가봉(오바메양), 이집트(살라), 잉글랜드(제이미 바디)다. 이렇듯 득점왕이 PFA 시상식에서 소외된 경우는 꽤 많았다. 이들의 국적과 인종도 다양한 편이다. 따라서 손흥민이 인종차별 때문에 PFA 시상식에서 제외됐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손흥민은 잉글랜드 축구계가 가지고 있는 아시아 선수에 대한 선입견에 상반되는 새로운 캐릭터다. 그는 매력적이고 언제나 웃고 있다. 폭발적인 플레이를 펼치며 극적인 골로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내성적인 다른 아시아 선수들과 달리 손흥민은 동료뿐만 아니라 상대 팀 선수, 감독과 스스럼없이 어울린다.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뛸 때는 독일어로, 지금은 영어로 인터뷰도 수월하게 소화한다. 지난겨울 영국 도시 곳곳에는 손흥민을 모델로 프리미어리그를 현지 팬들에게 홍보하는 광고판까지 등장했다. 그는 아시아 출신으로는 최초로 세계 최고 리그를 대표하는 선수로 성장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존재해온 편견을 바꾸기는 정말 어렵다. 잉글랜드 혹은 유럽축구계는 아직 아시아 출신을 최고의 선수로 받아들일 준비가 덜 되어있다. 손흥민 같은 스타일의 선수가 다시 등장하지 않으면, 서구인들은 “그는 이례적인 케이스였어”라고 치부할 게 뻔하다. 그리고 “아시안은 축구를 못한다”는 선입견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손흥민은 지금 외로이 서구인이 가진 스테레오 타입에 맞서고 있다. 그를 롤 모델 삼아 제2, 제3의 손흥민이 계속 나오길 희망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6.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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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IFFHS 선정 11년 연속 아시아 1위 리그

국제축구역사통계연맹(IFFHS)이 선정한 '아시아 최고 리그'는 K리그였다. IFFHS가 최근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2021년 전 세계 프로축구리그 순위에서 K리그는 22위를 기록했다. 이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소속 프로축구리그 중 가장 높은 순위다. 이로써 K리그는 2011년부터 11년 연속으로 IFFHS 선정 아시아 프로축구리그 순위 1위 자리를 지켰다. 2021년 K리그의 환산점수는 577.5점(22위)이고, 일본 J리그가 449점(34위), 이란 페르시안 걸프 프로리그가 404점(40위), 사우디아라비아 프로페셔널리그가 362점(48위) 등으로 뒤를 이었다. 2021년도 전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는 브라질 세리에A(1406점),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1204점), 이탈리아 세리에A(1060.5점) 순이었다. 한편, IFFHS가 발표한 세계 프로축구클럽 랭킹에서는 울산 현대가 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61위를 차지했고, 전북 현대와 일본의 가와사키 프론탈레가 101위로 뒤를 이었다. 대구FC는 144위, 포항 스틸러스는 152위에 올랐다. 김영서 기자 ◇ 2021 세계 프로축구리그 순위 (아시아) 순위 / 아시아순위 / 국가 / 점수 22위 / 1위 / 대한민국 / 577.5 34위 / 2위 / 일본 / 449 40위 / 3위 / 이란 / 404 48위 / 4위 / 사우디아라비아 / 362 66위 / 5위 / 우즈베키스탄 / 309.5 73위 / 6위 / 아랍에미리트 / 287 77위 / 7위 / 카타르 / 252 80위 / 8위 / 태국 / 202.75 2022.02.02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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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축구가 미국에서 인기 없는 이유①

질문 1.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의심의 여지 없이 축구다. 질문 2. 그런데 축구는 왜 스포츠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인기가 없을까? 물론 축구는 근래에 들어 어린이, 청소년과 여성들을 중심으로 미국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현재 미국의 주요 스포츠 중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축구는 2012년 미국 남자, 여자 고등학생들이 가장 많이 하는 팀 스포츠 1위와 3위에 각각 올랐다. 이런 현상을 반영하듯 “사커 맘(Soccer Mom)”이란 표현이 미국 영어에 있다. 이들은 도시 교외에 살고 있는 중산층 이상의 여성들로 자녀들의 뒷바라지에 헌신적이다. 사커 맘이란 용어도 미니밴이나 SUV를 몰고 학령기의 아이들을 축구 경기에 실어 나르는 데서 유래했다. 하지만 “Soccer is for sissies, kids and girls(축구는 계집애 같은 사내, 어린이와 소녀들을 위한 것이다)”란 말이 있을 정도로 축구는 미국에서 주류 스포츠가 되기에는 커다란 장벽이 있다. 여러분이 열렬한 스포츠 팬이라면 “왜 축구는 미국에서 인기가 없을까?”라는 생각을 최소한 한 번쯤은 해봤을 것이다. 많이 궁금하지만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려운 이 주제. 같이 한번 파헤쳐 보자. 미국의 4대 프로스포츠인 미식축구(NFL), 농구(NBA), 야구(MLB)와 아이스하키(NHL), 그리고 나스카(NASCAR, 자동차경주대회) 등이 이미 미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서 축구가 끼어들 틈이 별로 없다는 주장도 있다. 틀린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미국 특유의 문화 때문이다. 축구에는 미국인의 사회적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많은 측면이 있다. 첫째, 미국인은 무승부로 끝나는 경기를 혐오한다. 이를 반영하듯 NBA, MLB(악천후 등으로 인해 무승부로 끝날 때도 있으나,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와 NHL 경기에 무승부는 없다. 축구에는 동점으로 끝나는 경기가 얼마나 자주 나올까? 가장 인기있는 축구 리그인 프리미어리그(EPL)의 5시즌(2015/16~2019/20)을 살펴보면, 총 453경기가 무승부로 끝났다. 동점으로 끝나는 비율은 23.8%다. 같은 기간동안 전체 경기의 7%가 0-0 경기였다. 미국의 최상위 프로축구리그인 메이저리그사커(MLS)는 첫 시즌인 1996년 축구를 '미국화'하기 위해 아이스하키의 '페널티 슛아웃'과 비슷한 규칙을 도입했다. 동점으로 경기가 끝난 경우 승부를 가리기 위해 선수는 골대로부터 32미터 떨어진 거리에서 공을 드리블해 들어가 5초안에 슛을 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규칙은 기존 축구팬들의 반발을 불렀고, 결국 1999시즌을 마지막으로 폐지됐다. 미국인들은 “모두가 이겼어(everybody wins)”나 “얘들아 다 잘했어(you’re all doing great, guys)” 같은 말은 재미로 하는 어린이들 경기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프로 레벨의 경기에서 그들은 승부가 나야 직성이 풀린다. 미국 스포츠 문화에서 무승부는 “두 팀 다 잘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두 팀 다 졌다”로 해석된다. 팬들 입장에서도 2~3시간을 투자해서 경기를 봤는데 무승부로 끝난 경우, 이는 시간 낭비일 뿐이다. “A tie is like kissing your sister(동점은 여자 형제와 키스하는 것과 같다)”라는 표현이 말해 주듯이 미국인들은 무승부를 싫어한다. 이런 미국인들에게 특히 0-0으로 끝나는 축구 경기는 악몽과 같다. 둘째, 미국인은 점수가 많이 나는 스포츠를 좋아한다. 미국에서 독보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NFL의 경우 2020시즌 경기당 평균 득점이 49.6이었다. MLB도 지난 20년 동안 경기 당 평균 9점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야구 경기의 특성상 관중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점수다. 그에 반해 2020/21시즌 EPL 경기당 평균 득점은 2.7에 불과했다. 따라서 축구는 1~2골만 지고 있어도 경기 막판에 역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막판에 극적인 역전승이 가능한 NBA나 MLB 등과 비교된다. 다득점 스포츠를 선호하는 것은 미국 문화 특유의 '큰 것에 대한 집착'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미국이 가진 넓은 국토만큼 그들은 큰 것을 선호한다. 큰 자동차, 넓은 거리, 높은 빌딩을 비롯해 미국에서 파는 스테이크, 햄버거도 정말 크다. 운동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성공하려면 키가 커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은 사이즈에 집착한다. 미국 사회는 또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이라는 경제적 원칙을 중요시한다. 즉 미국인은 자신이 가진 제한적인 여가 시간을 가능한 최고로 즐기고자 한다. 따라서 그들은 2시간을 투자해서 겨우 2골 남짓 나오는 축구 경기에 매력을 못 느끼는 것이다. MLS는 골대를 넓혀 더 많은 골이 나오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민한 적도 있다. 셋째, 축구는 공정하게 시간 계산을 하지 않는다. 후반 정규시간이 끝날 때쯤 대기심이 보여주는 추가 시간은 언제나 3분이나 4분 같은 분 단위로만 주어진다. “정확하게 계산을 했을까?”라는 의심이 안 들 수 없다. 아울러 추가 시간 동안에도 부상, 골, 선수 교체 등의 변수는 계속 생겨, 정확히 언제 경기가 끝날 지 아는 사람은 주심밖에 없다. 복마전 같은 국제축구연맹(FIFA)처럼 축구의 시간 계산은 비밀스럽고 불투명하다. 축구는 가뜩이나 막판에 역전하기 어려운 경기인데, 팬들은 경기 휘슬마저 정확히 언제 울릴지 알 수 없다. 축구의 이러한 특성은 공정성과 극적인 역전 기회를 중요시하는 미국인들에게 어필하기 힘들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1.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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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니에스타 “PSG 유니폼 입은 메시 보면 마음 아플 것” 심경 토로

FC바르셀로나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안드레스 이니에스타(37·고베)가 리오넬 메시(34)의 이적을 두고 복잡한 심경을 밝혔다. ‘축구의 신’ 메시는 11일(한국시간) 프랑스 프로축구 리그1(1부리그) 소속의 파리 생제르맹(PSG)으로 팀을 옮겼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라리가) 바르셀로나에서만 21년 동안 뛰었던 메시는 클럽의 경제·규정적 문제 때문에 새로운 팀을 찾아야만 했다. 결국 최종 행선지를 PSG로 선택했다. 계약 기간은 2년이고 1년 연장 옵션이 있다. 등번호는 30번이다. 메시는 바르셀로나에서 라리가 우승 10회,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UCL) 우승 4회, 코파 델 레이(스페인 국왕컵) 우승 7회 등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전성기를 이끌었다. 메시 또한 바르셀로나 소속으로 21년 동안 778경기를 뛰며 672득점 305도움을 기록해 최고의 축구선수에게 주어지는 발롱도르를 6회나 수상했다. 이니에스타 역시 메시와 함께 바르셀로나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니에스타는 2002년부터 2018년까지 바르셀로나에서 뛰며 9번의 라리가 우승, 4번의 UCL 우승 등을 안겼다. 정확한 패스 능력을 바탕으로 메시에게 공을 운반함으로써 메시가 세계 최고의 공격수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이니에스타는 2018년 5월 일본 프로축구리그(J리그) 비셀 고베로 이적했다. 프랑스 통신사 ‘AFP’는 메시의 PSG 이적에 대한 이니에스타의 심경을 전했다. 이니에스타는 “바르셀로나 내부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구단은 이번 일에 대해서 빠르게 회복해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메시가 다른 팀의 유니폼을 입고 뛰는 걸 보는 건 마음이 아플 것 같다. 메시는 수년 동안 바르셀로나를 대표했다. 메시 같은 선수를 본 적도 없고, 미래에도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아쉬워했다. 김영서 인턴기자 2021.08.1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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